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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배상명령신청제' 유명무실

법상담025858863 2011. 2. 5. 10:42

[ 2011-02-01]
'성폭력 피해자 배상명령신청제' 유명무실
제도 도입 8개월, 35건 신청에 인용은 불과 8건에 그쳐
피해자들 피고인과의 접촉 꺼려 이용률 겨우 0.8%
'피해자 위한 변호사제도' 도입… 구제절차 진행돼야


지난해 10월 40대 여성 A씨는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다. 자신이 일하던 노래방에 놀러온 손님 B씨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며 주먹과 발로 때리고 옷을 벗겨 강간하려 했다. 다행이 전화를 받고 달려온 남편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악몽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해자 B씨는 검찰조사과정에서 A씨가 입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보상은 커녕 병원치료비조차 배상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B씨의 파렴치함에 분노하던 A씨는 검사로부터 성폭력범죄 피해자도 배상명령을 통해 치료비와 위자료 등을 배상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고 재판부에 배상명령신청서를 냈다. 1심 법원은 B씨의 유죄를 인정, 징역 6년에 10년간 전차발찌부착을 선고하면서 A씨에게 530여만원을 배상토록 명령했다.

이는 지난해 5월 도입한 성폭력범죄 피해자 배상명령제도가 진가를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고 있지 않아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조두순사건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번졌던 각종 성폭력범죄에 대한 대처와 피해자보호를 위한 방안으로 제도가 도입됐지만 인식부족과 성폭력범죄의 특수성, 위자료산정의 어려움 등으로 좌초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에 따라 제도에 대한 홍보강화와 함께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사제도를 도입해 성폭력범죄 피해자들이 피고인과 대면하지 않고도 배상명령 등 피해회복절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포함한 제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시행 8개월간 35건 신청, 이용률 성폭력범죄 100건중 1건에도 못 미쳐= 배상명령제도는 법원이 직권 또는 피해자(또는 상속인)의 신청에 따라 별도의 민사소송없이 범죄행위로 인한 물적피해와 치료비,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피고인에게 배상하라고 형사사건 유죄선고와 동시에 명령하는 제도다. 피해자들의 소송부담을 덜어주고 신속한 피해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됐다. 개정법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한 경우 지체없이 성폭력범죄 피해자에게 배상명령신청을 할 수 있음을 통지하도록 하고 있다.

또 대법원은 홈페이지(www.scourt.go.kr) ‘전자민원센터-양식모음’ 코너를 통해 배상명령신청서양식도 내려받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가 처음 시행된 지난해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8개월간 전국 법원에 접수된 성폭력범죄피해자의 배상명령신청은 단 35건에 불과하다. 같은기간 기소된 성폭력범죄건수가 4,466건임을 감안할 때 전체 성폭력범죄중 단 0.8%에서만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100건중 1건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그나마 이 기간동안 인용된 배상명령신청은 8건. 인용률이 22.9%에 불과하다. 같은기간 사기·절도·상해 등 전체 배상명령사건 인용률 43.8%의 절반 수준이다.

◇ 인식 부족, 위자료산정 어려워=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피해회복을 위해 도입된 제도지만 이처럼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제도에 대한 인식부족이다. 형사부 판사와 검사 등 형사사건을 다루는 전문가들도 성폭력사건을 전담하지 않으면 이런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일반인인 성폭력 피해자들이 배상명령제도를 제대로 알기는 더 힘든게 현실이다.

성폭력범죄의 특수성상 피해자들이 피고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점도 걸림돌이다. 검찰 관계자는 “성폭력범죄피해자의 경우 검찰 등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연락하는 경우에도 범죄피해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며 “검사들이 피해자 조사때는 물론 공소제기 후에 사건처리 결과를 연락해주면서도 배상명령을 신청할 수 있음을 안내해 주고는 있지만 배상명령신청으로 가해자인 피고인과 마주치게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 신청을 꺼려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위자료산정의 어려움으로 재판부가 신청자체를 각하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제도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병원치료비의 경우 영수증 등 물증이 분명해 배상명령액으로 인정하기 쉽지만 성폭력범죄피해자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등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 위자료산정이 쉽지 않다”며 “특히 피고인에 대한 선고가 임박해도 피해자가 계속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가 많아 선고시점에 어느 정도가 합리적인 배상액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각하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또 “성폭력사건은 사법절차 진행중에 피고인이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합의금을 공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그 공탁금을 단순 위로금인지 손해배상액이 포함된 것인지를 파악해 얼마나 배상명령액을 증액 또는 감액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라며 “범행의 경중에 따라 일반적인 배상기준을 정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정신적 피해의 정도는 개인차가 너무 커 일률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 피해자 위한 국선변호인제도 도입해야= 이에따라 제도 활성화를 위한 홍보강화와 함께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해 성폭력범죄피해자들이 보다 실질적으로 범죄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예산 등 재정적 문제를 고려해야겠지만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제도를 도입해 피해자들이 이들 법률전문가에게 위임하거나 도움을 받아 배상명령신청이나 다른 피해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현재 18세미만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법률조력인 제도도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성인 피해자들까지 확대하는 방법도 검토해볼만 한다”며 “다만 여러가지 제반사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제도 활성화를 위한 홍보강화가 무엇보다 급선무”라며 “특히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제도를 빨리 도입해 피해자들이 형사사법절차에서 소외되지 않고 법률적 조력을 받으며 다양한 피해회복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통해 배상명령 외에도 형사조정, 형사화해제도 등 화해적 분쟁해결수단 뿐만 아니라 민사소송 등 피해회복을 위한 다양한 절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